2005년 02월 07일
[시티라이프 2001-11-15 16:00]
박주연 기자
카이에(P.Caille)는 “현대는 번역의 시대”라고 말했다.
정보교환과 문화 수용의 수단으로 번역이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지적한 슬로건이다.
하지만 번역작가의 세계는 화려하지 않다. 번역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노동력에 비해 수입이 적고, 명성을 얻기도 어렵다.
작가의 이름 때문에 책을 선택하는 독자는 많아도, 번역가의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르는 독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행한 ‘2001,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발행된 번역도서는 8,839종. 이는 전체 도서 발행 종수의 34.48%에 해당한다. 99년도엔 26.47%, 98년도엔 23%였던 것과 비교하면 해를 거듭할수록 전체 출판시장에서 번역도서의 점유율이 높아짐을 알 수 있다.
민음사 조영남 문학팀장은 “90년대 들어와서 편집부 혹은 기획부 등으로 대변되는 출판사 자체의 기획력이 높아지면서 정보와 매체에 발빠르게 대응하게 된 것”을 번역서 증가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또 “전문번역가 집단이 생성되고, 번역가 에이전시를 통해 번역가들을 소개받을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된 것도 주요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창작과비평사의 유용민 부장은 “인터넷의 확산”을 번역서 범람의 큰 요인으로 지적했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은 가만히 앉아서도 해외의 신간 동향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어 번역서가 많이 나온다는 설명이다.
특히 신생 출판사의 경우는 번역서 출간에 더 의지하는 경향이 짙다. 신생 출판사는 국내의 저력있는 작가들의 책을 출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 색깔을 확실히 드러내는 데는 물량이 풍부한 해외 저작물을 선택하는 것이 손쉽다.
최근 아동도서 번역서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신생 출판사 대다수도 외국의 아동서를 번역, 출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번역서가 증가한다고 해서 번역자들에 대한 대우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번역가들이 받는 대가가 박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번역가에 따라 원고지 매수당 2,000~4,000원 정도의 원고료를 지급하는 게 보통이다. 인세 방식의 경우 10% 내외의 인세 가운데 원저자에게 6~7%를, 번역가에게 3~4%를 지급한다.
< 대중소설이나 비소설 분야에 치중 >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문번역가들은 많이 팔릴 만한 책을 번역하려는 경향이 크다.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학문적 성과가 있는 인문서적이나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좋은 책은 뒷전인 채, 상업성이 높은대중소설이나 비소설 분야에 치중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또 그는“잘 팔릴 만한 책은 여러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번역, 출간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피력했다. 이와 관련한 가장 최근 사례가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이다. 이 책은 문학세계사와 예담에서 지난 9월 출판된 데 이어 문학동네에서도 10월 출판됐다. 동일한 작품을 세곳의 출판사가 잇따라 번역해 내놓은 것이다. ‘어린왕자’‘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등도 국내 여러개의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했다.
시장논리에 급급하다 보니까 잘못된 번역도 왕왕 속출한다. 책을 빨리 내놓겠다는 출판사의 계산은 곧 빠른 번역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럴 경우 여러 번역가가 책을 몇단락씩 쪼개서 번역하거나, 중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 중역이란 가령 영어가 원서일 때,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을 말한다. 쪼개서 번역하거나 중역을 할 경우 결과적으로 번역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번역을 원어에 충실하게 하지 않았다고 ‘무능한 번역가’로 몰아붙이는 건 잘못된 시각이라는 항변도 있다. 민음사 조영남 팀장은 “해당 도서의 독자층이 누구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질 수 있다”며 “번역가의 자율성은 도외시한 채 토씨 하나 틀렸다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번역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 소수 번역가에 작품 편중, 번역에 대한 잘못된 인식 문제 >
실제로 번역자들이 느끼는 고충은 적지 않다. 우선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지만 수입이 적다. 게다가 초기의 성서 번역자들을 제외하고는 후세에그 이름을 널리 알린 번역가는 거의 없다. 고려대 불문과 교수이자 국내에서 손꼽히는 번역가인 김화영씨는 한 칼럼에서 “박식한 학자와 기술자(언어학자)와 영감 넘치는 예술가(작가)의 중간쯤에 위치한 수공업자인 번역자는 고통스럽고 고단하지만 대개의 경우 자신의 고통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보다는 실수에 대한 비판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는 딱한존재”라고 말했다.
출판사가 계약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번역작가 에이전시인 서울출판정보가 최근 번역작가 10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 대부분의 번역가들은 “현재의 번역료가 너무 적으며, 출판사가 번역료 지불일 등의 계약을 지키지 않거나 번역료를 아예 못받게 되어 경제적인 곤란함을 느낄 때 회의를 느낀다”고 답변했다. 소설 번역의 경우 몇몇 전문 번역가들에게 작업이 편중되는 현상도 있다. 출판사들이 검증된 번역가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현상이꼭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한 번역가가 맡는 분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성의있는 번역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전문 번역작가 양성 시급 >
한길사 이승우 차장은 “수준 높은 전문 번역가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출판사들이 돈 되는 책만 번역, 출판하고 고급 인문학 서적을 외면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번역가에게 의뢰하는 책 자체가 수준이 떨어지다 보니까 정작 수준 높은 책을 번역, 출판하고자 할 땐 의뢰할 마땅한 번역가를 찾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전문 번역가 양성이 시급하다는 것.
시드니 셀던의 ‘시간의 모래밭’, 존 그리샴의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갔다’ 등을 번역한 공경희씨 역시 번역가 양성 부진을 지적하고 “번역가의 경우 대학에서 준비되어 배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결국 번역가를 필요로 하는 출판사에서 양성해서 일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번역료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했다.
학부제 실시는 번역가를 양성하지 못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이 영문과로 몰리면서 독문과, 불문과 등 기타 학문이외면당하고, 이는 곧 해당 언어권의 번역자 양성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번역에 대한 학계의 낮은 평가도 인문서 번역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교수들이 번역했을 때, 번역이 교수평가 항목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이는 곧 교수들이 번역을 기피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결과적으로 인문서 번역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교수로 여러권의 책을 번역, 출판한 김성곤씨는 “번역을 저술로 인정해주지 않을 경우, 전공학자들의 번역 기피 현상은 심화될 것이므로 번역을 저술과 같은 비중의 연구 업적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피력했다.
< 한국어 저작물 수출은 여전히 걸음마 수준 >
외국 도서를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는 사례는 날로 증가하는 반면 한국어 저작물의 해외수출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사항이다. 몇몇 재단을 중심으로 번역, 출판을 지원하고 있지만, 고전과 전문 학술서는 여전히 사각지대이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문학 번역작품집의 해외출판은 최근 20년간 173권에 그쳤다. 여기에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집계한 950여종과 대산문화재단으로 지원한 출간된 37종을 더해도 지난 100여년간 외국에서 출간된 한국어 저작물은 1,200여종도 안된다. 한길사 이승우 차장은 “영역을 하거나 불역을 해야 하는데 국내에 그런 역할을 수행해낼 마땅한 번역가와편집·교정 인력이 없으며 한국의 출판문화에 대한 외국의 관심이 저조하기 때문에 한국어 저작물의 해외수출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번역에 대한 인식이 낮고 번역작업에 대한 물질적 대가가 낮다는 점, 그리고 번역을 최소한의 경제력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잘못된 풍토, 전문 번역가 양성 소홀 등 우리 번역문화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수출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 모색과 함께 전문번역가를양성하고, 번역료를 현실화하며, 번역을 학문적인 성과로 인정하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우리의 번역문화도 문화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재자로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by bono | 2005/02/07 19:41 | 트랙백 | 덧글(1)